70년대 우리는 모두가 그랬듯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시니컬한 상태로 라디오를 끼고 저것만 줄창 들었어. 흑백티비가 있었어도 채널권은 아부지가 가졌기에 저녁식사 후 이북출신 아부지가 애정하는 반공드라마, 그리고 뉴스가 끝나면 내 방으로 들어와 애지중지 라디오만 끌어 안고 살았다. 책상 위에는 교과서 참고서 나부랭이가 연습장 짝꿍 모나미볼펜과 함께 위장겸해 뒹굴고 있었지.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11시면 골아떨어지던 내가 그날따라 잠이 안와서 재미도 없는 소설책을 읽다가 내던지고 라디오를 틀었는데, 12시가 다 된 시각이었는지 '0시의 다이얼'이라고 외치며 시그널 음악과 함께 들리는 DJ의 저윽한 목소리가 내 심금을 울리더구나. 그 DJ가 이장희라는 가수였는데, TV를 보지 않으니 얼굴은 모르고 그저 목소리와 노래만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많아서 그의 노래를 즐겨 들었는데 0시의 다이얼의 DJ로 나타날 줄이야. 

그런 이장희의 얼굴을 TV에서 영접하는 날이 왔는데... 드디어... 음... 강렬했던 콧수염의 이미지가 내 눈에 콕 박혀 훗날 내 이상형의 기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동굴 저음의 콧수염; a.k.a. 레트 버틀러). 고작 중학생이던 난 뜻을 알지도 못하는 그의 노래를 음미하며 덩달아 심각해지곤 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곡이 금지록이 되어버렸거든. 그로 인해 이장희는 가수 생활을 중단하고 미국에서 방송 생활을 했다더군. 몇 년간 잊혀진거지.

쎄시봉의 가수들 그리고 팝송과 포크송으로 넘어가며 수많은 노래가 나왔지만, 난 그래도 이장희의 노래가 좋아. 얼마 전 미스터 트롯에서 한 가수가 부른 곡 들어볼래?

사실 이장희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어릴 적 아빠 차 안에서 '그건 너'라는 노래를 자주 들었던 기억이 나. '그건 너~ 그건 너~ 그건 너~ 때문이야~' 하는 가사를 '문이야'에 악센트를 넣어 나를 놀리곤 했지..^^; 가족들이 부르는 내 이름과 비슷해서 말이야. (두 번째 편지 참고)

엄마가 중학교 2학년 때면 1970년대 초반인데, 그 시절 가장 인기 있었던 노래 열 곡을 뽑아봤어.

1. 남정희 - 가는 정 오는 정

2. 정훈희 – 그사람 바보야 

3. 나훈아 - 그정 못잊어 

4. 이상열 – 난이야 

5. 김추자 - 늦기전에

6. 김부자 - 당신은 철새 

7. 패티김 – 람디담디담 

8. 배성 – 망향 

9. 배성 – 무정한 여인 

10. 나훈아 – 바보 같은 사나이 

이 중에 내가 아는 노래가 한개도 없어..😂

어린 시절 나는 일기예보의 '좋아좋아'라는 노래가 가장 좋았어. '여보세요 나의 천사'하는 부분이 왠지 다정해서, 남자친구도 사귈 줄 모르고 사랑이 뭔지도 몰랐던 그 어릴 적에도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혼자 설레곤 했어. 이 노래 때문인지 난 아직도 다정함을 가장 높게 평가해. 다정함을 말로 전달되는게 아니잖아. 다정한 눈빛, 다정한 손길, 다정한 목소리가 퍽퍽한 내 마음을 건드리는 것 같아.

나도 학창시절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자정에 시작하는 라디오를 몇 번 들었었어. 방송은 얼마전 크게 논란이 됐었던 유모씨의 라디오천국이었는데, 거기 정해진 요일에 출연하는 검정치마가 너무 좋아서, 특히 검정치마의 'antifreeze'라는 곡을 너무너무 좋아해서 밀려오는 잠을 꾸역꾸역 참으며 들었던 기억이 있어. 그 노래도 가사가 참 다정하고 로맨틱해. 가장 좋아하는 가사는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거야'라는 부분이야. 둘이 사랑하면서 빙하기같은 시기가 닥쳐도 춤을 추며 이겨낼거라니, 너무 로맨틱하지 않아?

아무튼, 어린 시절의 나처럼, 어린 시절의 엄마도 잠못 이루는 고요한 밤 12시 라디오를 들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나왔다는 것, 단 한번도 라디오를 끝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ㅋㅋㅋ) 들이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해. 나랑 엄마는 시간차를 극복하고 같은 감정을 느꼈었구나, 하며 왠지 마음 속 무언가가 몽글몽글하게 맺혀서 눈물로 나올 것만 같아.

요새 음악심리상담을 공부하는데, 음악에는 자기표현, 자아성찰, 대인관계 개선 등 다양한 심리치료적 기능이 있다고 해. 특히 GIM(Guided Imagery & Music), 심상음악치료라는 기법이 있는데, 음악을 들으면서 느끼는 것들과 떠오르는 기억들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그 안에 숨어있는 묵은 감정과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기법이야.

어려운 용어로 표현했지만 결국 이 기법은 우리가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행하는 치유법인 것 같아. 슬플 땐 슬픈 노래를 들으며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나면 왠지 개운해지는 그런 경험이 다들 있잖아. 엄마의 편지를 읽으니 어린 시절 엄한 집에서 틀에 박힌 하루를 보낸 뒤 외롭게 방안에서 잠 못 이루는 어린 소녀가 떠올랐어. 엄마에게 이장희의 노래는 그 어린 소녀에게 잠시나마 숨통을 트이게 해준 그런 노래가 아니었을까? 지나온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지만, 그 시절의 엄마를 꼭 안아주고 싶어.

세월은 흘렀고 엄마는 어느새 60대가 되었지만, 엄마 마음 속에 남아있는 그 때 그 시절 몰래 라디오를 듣던 1960년대의 어린 소녀가 다시 나타난다면, 나도 같이 라디오를 듣던 2000년대의 소녀가 되어 엄마와 함께 할게. 지나간 추억은 그대로 간직하고, 또 새로운 추억도 새로운 음악과 함께 만들어가자. 빙하기같은 상황 속에서도 같이 춤을 추면서 말이야.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숲속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네.

새의 지저귐이었지. 사람들이 새의 음성을 말로 표현하며,

흉내내려 했다네. 그러자 새들이 인간을 가르쳤지.

인간의 예술이 시작되기 전 새들이 인간에게 노래를 가르쳤다네.

-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강대진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