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본 적조차 없는 주제를 받고 보니 좀 당황스럽구나. 나는 당장 내 앞에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며 현 상황을 이겨내기 급급해서, 반대급부는 생각해보지 못했어. 결혼은 후회할지언정 너희들을 만난 것은 후회하지 않았거든.

분석을 좋아하는 난 과거의 실수와 실패를 경험삼아 현재를 나아가야 해서, 가끔 지나가버린 과거를 소환하게 되면 슬프고 우울할 때가 많다. 이미 나는 결혼해서 금쪽같은 아이를 둘이나 낳았고, 그리고 이쁘게 키워야 했고, 제대로 독립시켜야 한다는 생각뿐.

나이는 먹었고 더이상 무엇을 새로이 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되니, 주어진 여건 하에서 열심히 사는 것뿐인데, 이미 지나가버린 30대, 40대, 50대 그리고 60대를 논하라고?

주제를 받고 암만 짱구를 굴려도 생각나는 것이 없네. 결혼 전 20대에는 꿈이 있었으니 여행다니는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겠지만, 결혼 후에는 진심 아무 생각이 없다. 유해진의 명언이 생각나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결혼 전에도 그랬고, 결혼 후에도 그랬듯이 난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면서 열심히 헤쳐나가는 것이 내 할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혼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아이도 둘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라는 상상조차 나에게는 사치인 것 같아. 미래를 꿈꾸기보다는 과거를 발판삼아 현실에 충실하다보면 나의 미래는 당연히 좋아질 거라는 신념이 있기에, 미안하지만 이미 벌어진 내 인생을 뒤집을 생각은 없다. "다시 태어난다면..."이라는 생각조차 반갑지 않은데 말이지. 

다시 생각해보니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자잘한 희노애락은 모른채 그냥저냥 하고 싶은거 하면서 현재에 충실히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네. 난 도전은 좋아하지만 모험은 하지 않으므로...

결혼에 대해서 논하는 엄마의 말투에 늘 후회가 묻어있어서, 만약 엄마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지, 그리고 당시 엄마의 상황 속에서 그러한 결정을 했다면 실제로 자유로웠을 수 있었을지 궁금했어. 지나간 과거는 늘 쉽게 미화되잖아.

나는 후회를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현실이 불만족스러울 때마다 과거에 이랬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해. 그때 그 진로를 택했더라면, 그 사람을 만났더라면, 그 곳에 갔더라면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웃기게도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하다보면 결국 그 삶도 결코 지금보다 행복할 수 없을 거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더라고.

엄마도 원했지만, 나도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했었잖아. 포기한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아나운서냐고 물어볼 때마다 마음이 저릿해.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던 내 마음이 분명히 강했는데, 점점 지망생은 많아지고 TO는 적어지는 상황을 보고 내가 긴 시간을 아무 수입 없이 지내야 할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더 컸어. 공대에 진학하면 아무 무리없이 바로 취업이 가능했고 일정한 수입이 보장된다는 걸 안 나는 그냥 '공대를 나온 아나운서가 더 메리트 있을 거야'라는 말로 합리화하며 공대에 가기로 했고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진로를 바꿨어.

당시 나는 내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했다고 믿었었어. 그래서 만약 내가 그때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걸 선택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정말 오랫동안 했었어. 난 분명 잘했을거고 내 인생은 지금과 달랐을텐데, 라며 간 적도 없는 길을 상상하며 지금보다 행복했을 거라고 단정지었어.

그런데 어느 날 또 그 생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 '그 때 그랬으면 진짜로 내가 행복했을까?' 그래서 한번 그 선택을 했을 때의 나를 하나씩 그려봤어. 신문방송학과에 간 나, 높은 경쟁률을 뚫고 지방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된 나, 전문직과 선을 보고 시집가서 주부가 된 나의 모습까지. 그런데 뭐 하나 나답지가 않더라. 아마 그 사이에 분명 나는 내가 미련을 가지는 그 모습을 벗어나서 결국 지금과 유사한 생활을 하고 있을 것 같더라고. 그리고 그 때의 나는 그러겠지. '내가 아나운서 대신 일반적인 회사원이 되었더라면 더 행복했을 텐데.'하고 말이야.

아무리 그 때의 선택이 후회스럽다 해도,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기에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내가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는 걸 알아. 가끔씩 찾아오는 미련을 아예 없앨 수는 없지만, 그럴 때마다 현재에 만족하는 마음으로 돌아오는 법을 이제는 어느정도 익혀서, 예전에는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면 이제 조금더 빨리, 지름길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 같아.

엄마도 엄마가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니까, 선택의 순간에서 엄마의 마음보다는 상황에 따른 판단을 했었지 않을까 싶어. 어쩌면 그런 판단 역시 무언가를 완벽하게 해내고 싶다는 엄마의 마음이 개입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아직 엄마만큼 많이 살지 않았고 많은 고난을 헤쳐나가지도 않았지만,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나를 괴롭게 하는 선택 역시 사실은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이었다는 걸 알아. 아무리 후회해도 그건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그 당시의 내 마음을 위해 선택한 것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난 이 길로 다시 돌아왔을 거라는 것을 말이야.

결국 엄마 말대로 과거를 돌아보기보다는 이를 발판삼아 앞으로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고민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무언가를 탓하는 마음에 괴로움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 나는 내가 너무 힘들고 치열하게 사는게 억울하고 누군가를 찾아서 탓하고 미워하고 싶었는데, 결국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렇게 살 사람이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