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그렁그렁한 척 간신히 말씀드리니 왠걸, 할머니가 너무 좋아하시는 거야. 옛날 분들 레파토리 있잖아. "아들은 꼭 낳아야 한다", "애가 둘은 있어야 한다." 요즘은 "딸은 꼭 있어야 한다"라며?

할머니에게 용기를 얻고 씩씩하게 엉망진창 태교를 시작했어. 오빠 때는 입에도 대지 않은 커피를 두 잔씩 마셔가며 가끔은 네가 편하게 누워있는 남산만한 배 위로 오빠를 걸쳐 안고 속으로 말했어. "미안해 무늬야, 잠시만 찌그러 있어줘."

'무늬'는 내가 지은 너의 태명이야. 영어로는 'Moony', 글로벌 시대에 걸맞는 이름으로 지었지. 첫째는 아들이니 둘째는 꼭! 딸을 낳고 싶었어. 그래서 딸로 변신(?)시켜 준다는 초콜렛을 자주 먹었고, 태몽이 푸른 사과였다는데 사과이니 나름 딸일 거라는 해몽을 해가며 온 가족에게 너의 이름이 '무늬'(딸)라고 주입을 시켰어. (또 아들 이름이 무늬였어봐. 끔찍하지 않니?) 덕분에 성인을 한참 지난 너는 아직도 '무늬'로 불리우고 있지.ㅎㅎ

그렇게 10개월을 빡세게 노력한 덕분에, 난 너무도 바랐던 '딸'을 가슴에 안을 수 있었어. 엄마 뱃속이 답답하다고 2주나 빨리 나와서 여물지 못해 쭈글하다고 할머니는 너에게 '뚝배기'라는 별명을 하사했지만, 내 눈에는 세상 누구보다 이쁘고 그래서 눈부시고 태명대로 '달'같은 '딸'을 세상과 만나게 한 것이 제일 잘한 일이 아닌가 싶다!!

아는 분이 약 3년 전 아이를 낳고 부쩍 철이 든 모습을 보여줬는데, 누군가 그 분에게 '아이를 낳고 생긴 변화는 무엇인가요?'라고 물으니 그 분이 '세상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어요.'라고 답했던 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어.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도 감사함이 느껴지는 존재가 나의 아이 말고 또 있을까? 

엄마는 나에게 낳아준 것 외에는 해준게 없다고 하지만, 난 그 누구보다도 커다란 사랑을 받으며 귀하게 자랐다는 걸 알고 있어. 그래서 난 힘들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겨내. 아무 것도 할 줄 몰랐던 아기 때부터도 난 사랑받아왔으니까, 난 그저 존재만으로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난 이 세상에, 이 가족에 소속되어 있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렇게 되뇌면 나를 향한 화살도, 남을 향한 화살도 거둘 수 있어. 모두가 그저 존재만으로 완벽하니까, 그 누구도 자신을, 그리고 상대방을 해할 권리는 없는거야.

아직은 아이를 낳을 물리적/심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그 때까지는 나의 에너지를 타인에게 베풀고 싶어. 세상엔 이런저런 고통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잖아. 쭈글쭈글한 뚝배기 하나를 낳아서 키우는데도 온 가족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간 것처럼, 무력감과 좌절감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다시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고 당당하게 세상 앞에 나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 혹시 내 에너지가 고갈되면 엄마를 찾아갈게. 엄마는 그냥 날 꼭 안아줘. 엄마가 아무 이유 없이 날 사랑하는 것 만큼이나, 엄마의 포옹은 아무 이유없이 내게 아주 큰 힘이 되거든.

버섯머리 공주님과 뚝배기.

엄마는 이러다 뉴스레터가 유명해지면 유퀴즈에서 부르는 거 아니냐며 얼굴은 꼭 비밀로 해달라고 했지.

누가 나 몰래 엄마에게 김칫국을 끓여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유퀴즈에 나갈 일은 없을 테니 너무 부담스러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