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지금 네 나이 때 사직서를 냈어.

2023.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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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편지.

36년 전 내 나이 때 엄마는 하루를 어떻게 보냈어?

Dear My Child,

그 때의 나는 사직서를 내고 학원을 다니고 있었어.

36년 전, 88 서울 올림픽 개막 1년 전 매일매일 카운트다운 중이던 그 해, 경제적으로도 무척 활황이었던 해인데, 나는 무슨 용기였던지 과감하게 사직서를 던지고 자기계발을 한답시고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집에서 가까운 신사동 사거리에 있는 학원이었는데, 그 근방에 "리버사이드 호텔"이라는 거대한 빌딩이 있어서 매일매일 바쁜 척을 하면서도 언제쯤 저 호텔에서 커피를 우아하게 마셔볼까나 생각했더랬다. 집에서 선 보라고 할라치면, 신사동 그 호텔로 잡아주지 않으면 안본다고 했어. 다행히 운 좋게 그 호텔에서 맞선 성공했다 (네 아빠가 그 맞선남은 아냐). 한강 근방이 보이는 창가에서 쓰디쓴 커피를 마시며 본 맞선남 얼굴은 생각도 안나네 (맘에 들었으면 커피 맛은 환상이었겠지).

얼마 전 거의 30년 만에 아픈 어깨를 부여잡고 우거지상을 한 채 신사 사거리에 있는 병원을 찾아갔어. 그런데 그 옛날 그 모습은 커녕, 그 호텔 그림자도 안보이더라 ㅠㅠ 그래도 그 당시 신사동 사거리를 대표하는 우뚝 선 빌딩이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좁은 골목길 사이에 끼인 쭈그렁 건물이 되어버린 걸 보니, 병원에 간답시고 쭈글쭈글해진 나와 똑같은 신세구나 싶어, 들어가 우아하게 지금은 그 맛을 아는 커피라도 마시고 한강하늘이라도 구경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싶었다 ㅎㅎㅎ

Dear Mom,

원래 기대보다 씁쓸한 게 세상의 이치일까?

엄마,

난 지금 퇴직원을 제출하고, 저 멀리 남산이 보이는 사무실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어.

다른 팀은 다같이 앉아있는데, 우리 팀에는 나 혼자만 덩그러니 앉아 일하려니 왠지 내 자리만 더 춥고 조용한 것 같아.

절묘하게도 엄마의 36년 전처럼 나도 이렇게 회사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네.

다른 게 있다면 지금은 경제가 불황이라는 거?

엄마가 기대했던 커피 맛이 기대보다 씁쓸했던 것처럼,

엄마 기억 속 화려했던 호텔이 낡고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처럼,

원래 모든 건 기대한 만큼 씁쓸하게 다가오는 걸까?

이 회사에 5년간 근무하면서 누구보다도 이 회사를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퇴직원을 낸 순간부터 내게 돌아오는 건 왜곡된 시선과 비판의 가면을 쓴 비난들이었어. 조직은 기억력이 없다는 말이 정말 맞는지, 어느 힘든 상황에도 견뎠던 나의 헌신은 전부 까먹고 지금 여기를 떠나는 나를 무책임하다 말하는 모습에 실망도 참 크더라.

하지만 금세 기운을 되찾고 본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건 내 진정한 모습을 알아주는 사람들 덕분이었던 것 같아. 난 내가 어떤 결정을 하든 믿어주는 소중한 가족과 연인, 친구들이 곁에 있고, 감사하게도 내일 당장 굶을 걱정 없이 따뜻한 집에서 푹 쉴 수 있으니까. 아무리 회사에서 이 상황에 떠나는 나를 안좋게 포장한다 해도, 내가 5년간 쌓아온 직책을 벗어던진다 해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늘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줄 테니까.

퇴사를 결심하고 처음엔 마냥 후련하지만은 않았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갑작스레 찾아온 휴식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내가 내린 선택이 정말 합리적인 결정인지 끊임없이 고민되더라고. 앞으로를 계획하면서도 내 판단에 대한 의구심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막상 사직서를 내고 나니까 있지, 막연한 불안감은 사라지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한 실질적인 계획을 세우는 데 집중하게 되더라고. 사직서는 내기 직전까지가 가장 힘든가봐.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 후련하고 앞으로 내가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상상할 때마다 설레 ㅎㅎ

나처럼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과 자신의 가치를 비교해보라고 하고 싶어. 그 시간 동안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가치가 세상에 필요한 가치라는 확신이 있다면 도전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 내 잠재된 가치를 회사 속에서의 정치와 책임 회피로 더럽힐 이유는 없고, 난 언젠가 회사를 떠나 내 고유한 가치로 세상에 나와야 할 테니까.

오프라 윈프리의 「위즈덤」이라는 책에 '이 세상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진정한 목적은 진정한 우리 자신을 향해 가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와.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게 되면 무슨 일을 하든지 지치지 않고 힘이 솟을거래. 나도 이제 외적인 성공보다 내적인 성장에 집중하기로 했어. 어린 나이에 회사에서 받는 인정, 남들보다 높은 직급, 남들보다 많은 연봉은 결국 또 다른 비교대상을 만들어 마음을 초조하고 공허하게 만들더라고. 결국 인생의 마지막에 남는 건 나의 몸뚱아리 하나 뿐인데 말이야.

내가 퇴사하겠다고 말했을 때, 남들보다 숨가쁘게 달려왔으니 조금만 쉬되 다시 일어나 달리라고 말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더 쉽게 감정을 정리하고 앞으로를 계획할 수 있었어. 지금까지 달려온만큼 잠시 숨을 고르면서 내가 이뤄온 것들, 이뤄갈 것들을 한 번 돌아보고 다시 열심히 달려갈게. 달려가는 길에 엄마를 잠시 지나쳐간다 해도, 빠르게 한 바퀴 돌아 다시 곁으로 올테니까 계속 내 발자국을 따라 천천히 걸어와줘.

p.s. 다음에 리버사이트 호텔에 커피 마시러 가자. 혹시 모르잖아? 오랜만에 마시는 커피 맛은 기대보다 달콤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