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에게서 엄마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난 인정할 수 없었다. 너도 알다시피 할머니의 미모는 천상이시지 않니?

거울에 비치는 나의 모습은 영락없는 할아버지야. 할머니와 나들이 나가면 사람들이 한마디 하려는데 할머니가 속상해 하실까봐 대놓고 말 못하기도 해. "딸보다 엄마가 더 미인이시네요." 듣는 할머니는 속으로 그 분 아웃시키셨을 거야. 지금은 네가 이쁘게 자라서 이 말도 듣는다. "딸이 엄마보다 이쁘네." 나는 미소가 지어지면서 그 당시 할머니의 마음이 이해되더구나.

난 외모도 할아버지를 많이 닮은 듯하고, 성격조차 회계과 출신인 할아버지를 빼다 박은 것 같아. 천상 이과생인 것이지. 숫자 좋아하고, 분석 좋아하는... 그래서 영락없는 꼰대이고 깐깐한 분석주의자이지만, 너희들을 키울 때는 대변 색깔과 형태까지 분석해가며 작은 몸부림에도 근심하던 영락없는 엄마였단다.

할머니의 온화한 성품은 감히 따라갈 수도 없고 반의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내 성질 차분하게 다스려가며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겠지... 그러나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내 딸을 위해서라도 우리네 할머니들처럼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가끔은 나같은 돌연변이도 나와야 세상에 연구가치를 제공하지 않을까?

나와는 다른 사람을 더 이상 분석하기 귀찮아서 집콕을 사랑하지만, 구경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것 같아.

어디서 구경하느냐고?

엄마는 내가 엄마보다 예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지만, 엄마도 알다시피 난 늘 엄마를 닮고 싶었어. 엄마가 할머니랑 나보다 예쁘다는 말을 못들었다는 건 솔직히 난 이해할 수 없거든. 내 생각엔 그냥 할머니랑 나는 피부가 엄마보다 하얘서 그냥 지나가다 보기엔 좀더 화사해보였던 게 아닐까 싶어.

나와는 달리 외국인처럼 쌍커풀 라인이 바깥으로 나와있고, 오똑하고 예쁜 코와 도톰한 입술, 그 뿐만아니라 손가락 발가락마저도 너무 가지런하니 예뻐서, 어릴적 나는 왜 엄마 닮게 안 낳아줬냐며 매일 징징댔고, 엄마는 그런 내게 "니가 아빠 닮게 나온건데 그게 왜 내 잘못이냐"며 할 말 없게 만들곤 했지.

엄마는 늘 기준이 명확하고, 엄마 본인마저도 한치의 오차 없이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잖아. 마치 항상 똑 떨어지는 답이 나오는 수학문제 같달까? 난 그마저도 엄마를 닮고 싶었어. 그래서 20대 초반 내가 그렇게 칼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을 때 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엄청난 괴리감과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었어.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럴수록 내가 더 힘들어한다는 걸 알게 되어버린 거야. 엄마랑 똑같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내 모습이 밉기도 했고, 또 나보다 훨씬 똑부러져서 내가 허덕이게 만드는 엄마가 밉기도 했고 그랬었어. 지금은 내가 어떤 사람이든 그냥 이렇게 엄마랑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것만으로도 감사하지만 말이야.

난 아마 평생 엄마처럼 앞뒤가 딱딱 맞고 말과 행동이 정확히 일치하는 명쾌한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 같아. 왜냐면 난 어릴적에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 피아노를 치면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고, 내일 수영을 하면 수영선수가, 모레 발레를 하면 발레리나가 되고 싶은 변덕스러운 사람이거든. 나한테는 세상이 늘 너무 새로워. 내일 눈을 뜨면 또 어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까 설레고, 내년 이맘때의 나는 지금을 어떻게 기억할까 궁금하기도 하고, 매일매일 생각과 기준이 바뀌는 배낭여행같은 내 삶이 즐거워.

엄마는 할머니를 닮지 않은 엄마를 돌연변이라고 말했지만, 나도 엄마를 보며 자라왔기 때문에 이런 내가 너무 이상하고 비정상이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세상에 정말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잖아? 난 지금 이대로의 엄마가 너무 좋아. 그러니까 엄마도 엄마를 돌연변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랑 같이 가끔 엄마의 기준을 깨뜨려보기도 하면서 재미지게 지내보자!!

P.s. 그건 그렇고 다음주엔 아무래도 "엄마의 인생드라마 추천"으로 해야할 것 같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