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은 시간을 물어보면 금방 답할 수 있는데 반대로 물어보니 생각이 길어지네.

어려서는 잠드는 시간이 싫었어. 내일 또 일어나서 씻고 학교를 가던가 출근을 해야 해서... 일단 일어나 집을 나서면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왜 일어나기가 싫던지. 그래서 잠드는게 아까웠나봐. 할아버지께서 내가 피곤해 보일라치면 잠 좀 충분히 자라고 잔소리 하시거든. 그럴 때마다 "죽으며 영원히 잠들텐데 시간 아깝게 왜 자야 하냐"로 응수했었어.

너희 둘을 키울 때는 요즘 말로 육퇴(육아 퇴근)를 하고 홀로 야식 먹으며 기분 내던 시간이 무척 좋았다. 그때도 역시 다음날 육아전쟁이 시작되니 잠드는게 싫었어. 그래서 너희들 잠든 모습이 너무 이뻤어! 지금... 일을 그만두고 한가하니 잡생각이 많아져서 드라마 시청을 시작했어.

나름 고상파였는지 드라마와 코메디는 유치하다고 안보고, 다큐멘터리나 시사물만 보던 내가 코로나19로 인한 집콕 덕분에 드라마에 빠져 (스타트가 킹덤이었음) 울다가, 웃다가, 더 나아가서 시청 소감과 토론에도 열심이기에 원인을 생각해보니, 드라마에 희노애락도 있지만 장면 분석해보는 맛도 재미지더구나. 작품 하나가 이렇게 많은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구나 감탄도 했지.

예전에는 힘들 때는 다른 작가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마음 다스렸는데, 지금은 드라마를 보면서 위로를 받는다. 그 속에서는 미움도 괴로움도 속상함도 다 잊고, 간혹 나와 같은 스토리에 동질감을 느끼며 시청하다보니 시간도 잘 가고, 그때만은 내가 처한 상황을 잊게 된다. 나이 먹어갈수록 왜 다들 티비와 친구먹는지 알게 되네.

요즘은 전에 봤던 드라마 "나인"을 또 보고 있어. 아마도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가고 싶은가봐.

드라마엔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겨있어. 철학책이나 시사교양 프로그램에는 단 하나의 기준과 규범만을 강조하지만, 드라마에는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수많은 인생이 존재하고, 따라서 우리가 세운 삶의 양식과 규칙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 수 있게 되지. 결국 드라마를 통해서 우리는 다양한 삶의 형태에 대한 이해심을 넓히고 타인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을 키울 수 있는 것 같아.

드라마를 손에 꼽을 정도로밖에 보지 않은 나지만, 요 몇년 새 봤던 드라마 중에선 '멜로가 체질'이 참 재밌었어(너무 옛날 드라마인가?😅). 드라마를 보다 보면 주인공 여자 넷이 내 친구같이 느껴지고, 별난 것 없는 그들의 일상 속에 소소한 즐거움과 멜로가 존재하는 게 마치 내 일상도 나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고나 할까? 우리는 적당히 좋은 회사에서 적당히 높은 월급을 받으며 매일같이 똑같은 하루 속에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인생을 살고자 일상을 희생하며 애쓰고 있는데,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이름도 직업도 성격도 모두 평범하고, 심지어는 매일 퇴근 후 맥주 한 캔과 드라마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마저 우리와 똑같은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선에서는 너무 소소하고 즐거운 일상처럼 보이잖아. 나는 너무 내 인생을 가혹한 잣대로 평가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고민하게 되더라고. 삶에는 좋고 나쁨이 없는데 말이야.

나는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퇴사 전후로 완전히 바뀌었어. 회사에 다닐 때는 모든 일과를 다 끝내고 열시쯤 침대에 누워 조용히 하루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짧지만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는데, 지금은 아침에 눈을 뜨고 고요하게 감각을 깨워내는 시간이 가장 좋아. 자는 동안 찌뿌둥해진 내 몸 구석구석을 스트레칭하면서 어디가 불편한지 관찰하고, 또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어제와 어떻게 다른지, 날씨가 어떤지 주의를 기울여보면서 매일 새롭게 하루를 여는게 즐거워.

엄마도 한번 해봐봐. 아침에 창문을 열고 어떻게 생긴 구름이 떠있는지, 하늘의 색깔은 파란지 하얀지, 풀과 나무가 더 알록달록해졌는지 내려다보면 또 매일 다르더라고. 이렇게 매일 다른 하루를 시작하면 나도 왠지 어제보다 더 알록달록해질 수 있을 것 같고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

타임슬립류 드라마나 영화는 내가 봤다면 엄마도 무조건 봤을 것 같고... 떠오르는 건 '상견니'랑 '이프온리' 정도? 아, 얼마 전에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도 타임슬립이라면 타임슬립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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