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 때는 쇼핑을 무척 좋아해서 필요치 않은 물건도 사서 쟁여놓곤 했는데, 지금은 물욕이 없어진지 오래라 "당근(당신의 근처)"라는 마켓 앱을 애용하고 있어.

가격이 저렴해서 구입이 망해도 아쉽지 않고, 내 물건이 팔리면 시간 되면 직접 배달도 해준다. 구입자가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해결해보자는 속셈이지. 거래챗팅을 할 때 친절한 사람도 있지만, 형식적이고 사무적인 대화가 대부분이야.

올 초, 검색하다가 맘에 드는 청바지를 발견했어. 자칭 새옷이라는데 글쎄 사이즈가 "S"란다. 내가 55사이즈 입기는 하지만 절대로 "S"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잠시간 분석이 오갔어. 색깔과 디자인도 맘에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밴드가 착용되어 있어서 더 맘에 들었어. 밴드 늘린 길이, 힙둘레, 전체 길이 등등 사진 찍어가며 아주 상냥하고 친절한 답변이 오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절대 "S"일리 없다는 생각에 거절을 했다.

그 후 열흘이 지났어.

난데없이 그분에게서 "5천원에 드릴게요. 제발 사가세요."라는 챗이 왔어. 잘 맞고 이쁠 거라면서... 아니, 나를 언제 봤다고 저리 속단을 하지... 하면서도 기분 좋아지게 하는 사탕발림에 넘어가 그만 거금을 송금을 하고야 말았아. 아님 말고... 였어. 이쁜 소리 들은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서 "장사 참 잘하신다. 내가 넘어갔구나" 생각하며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어.

다음날 거래하기로 하고 주소와 전번 나누는데, 내가 갑자기 시간이 안되지 뭐니. 사정을 말했더니 자기 남편을 우리 집 근처로 보내겠다는구나. 참 열심히 사시는 분이구나 해서 친구 먹고 싶었다. ㅎ

드디어 나이 지긋한 아저씨에게 쇼핑백을 받아들고 집에 와서 입어봤는데... 세상에! 딱 내 거 아니겠니! 까짓거 5천원 버리려는 셈치려고 했는데 횡재했지 뭐냐.

잘 맞고 맘에 든다는 후기를 보내려고 켰는데 팔아줘서 감사하다는 챗이 먼저 왔어.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더니 기분이 무척 좋더라. 비대면 공간이라서 그다지 신경써서 대화하지 않았는데 그녀를 알고 나니 나도 친절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들도 누군가의 부모이고 자녀일테니 소중히 대해야겠지?

비싸지도 명품도 아닌데 친절하고 상냥한 그 분 덕에 내 기분이 좋아지고 그 바지를 입을 때마다 웃음이 저절로 난다. 물건을 잘 샀다기 보다는 저렇게 상냥하고 기분 좋은 시간을 잘 산것 같아 너무 좋았어!

엄마가 이 얘기를 처음 해줬을 때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 내가 보기에도 그 바지는 정말 딱 엄마꺼였거든. ㅋㅋㅋ

생각해보면 정말 행복한 소비란 구매한 물건 자체의 품질이나 가격보다, 그 소비를 하게 된 스토리와 그 안에 느껴지는 마음에 달려있는 것 같아. 몇 달 동안 돈을 아끼고 모아서 큰 맘 먹고 구매하는 명품보다, 길거리를 지나다 별 생각 없이 집어온 몇 천원 짜리 키링에 더 많은 추억이 담겨 있는 것처럼 말이야.

나도 얼마 전에 친구들이랑 영화관에 갔는데, 포켓몬스터 랜덤키링을 만원에 팔고 있는거야. 그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포켓몬인 이브이가 있었어. 원래 보장되지 않은 모험을 썩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왠지 이브이가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 역시 거금 만원을 들여 키링을 구매했지. 그리고 나온 것은 짜잔! 바로바로 생전 처음 보는 포켓몬이었어.

이름도 모르는 얘가 날 쳐다보고 있길래 처음엔 너무너무 실망했는데, 보다보니 또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똘똘해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여름이니까 하늘색도 나쁘지 않다! 싶더라고. 이름은 팽도리래. 아무래도 펭귄인가봐.

무엇보다 엄마가 말한 것처럼, 그냥 그 날 저녁 이게 뭐라고 한참을 고민하다 큰 맘 먹고 키링을 주문했던 그 순간과, 열어보고 순간 실망했던 내 유치한 마음과, 친구들과 맥주 한 잔 하면서 영화를 봤던 소소한 기억까지 모두 이 '팽도리' 속에 담겨있다고 할까? 백화점에서 뭘 사봐야 그냥 똑같이 친절한 직원에게서 늘 똑같은 멘트를 듣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쇼핑백을 들고 나오잖아. 물건 자체가 가진 가치보다, 내가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 물건이 오히려 나에게 더 소중한 물건이 되는 것 같아.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일수록 계절감을 잘 알아차린대. 늘 똑같아 보여도 조금씩 다른 나날 속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한다는 거야. 당근마켓에서 산 5천원 짜리 청바지 속에서, 만원짜리 키링 속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발견하는 능력도 마찬가지 아닐까?

매일매일이 똑같이 지루하고 즐거움이 부족하다면, 무심코 반복하는 일상에 조금의 변주를 줘보는 것도 방법인 것 같아. 늘 가던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퇴근하는 것, 늘 하던 인삿말에 상대방에 대한 칭찬 한마디를 얹어보는 것, 오랫동안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고민하던 물건을 질러보는 것! 그 걸 통해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행복한 추억을 하나 더해줄 스토리를 또 찾아낼지도 모르잖아?